경향신문|기사입력 2008-03-06 10:17
ㆍ“속 많이 끓였어 봄날이 오기까지”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고들 한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때를 맞기까지 어느 정도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배우 변희봉에겐 그 기다림이 유난히 길었다. 연기인생 40여년의 대부분을 주연 배우를 보조하는 ‘주변인’으로 보낸 그다. 잡범·도굴꾼·사이비교주 등 악역을 도맡아 하면서 마음의 상처도 많이 입었다. “나는 이 길이 맞지 않는다”면서 그만두겠다고 마음 먹기도 수차례. 그때마다 연기의 끈은 숙명처럼 그를 잡아당겼다.
기다림이 길면 열매도 크다던가. 변희봉에게도 봄날이 왔다. TV에서 지지부진했던 그의 운은 영화에서 활짝 폈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한 세 작품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은 ‘영화배우 변희봉’의 존재감을 두텁게 했다. TV에선 그의 역할을 제한했던, 위악스러움과 코믹함이 공존하는 묘한 얼굴은 영화에선 오히려 그의 경계를 넓혀 놓았다. 최근 개봉한 그의 첫 주연작 ‘더 게임’은 작품성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55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도 성과를 거뒀다. 젊은 스타배우들의 출연작도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고 있는 극장가에서 이 늦깎이 배우는 영화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티켓 파워’를 입증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쉬어야 할 나이인데, 아직까지 갈 길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지 않다는 그 자체는 굉장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좌절하기 시작하면 앞도 옆도 못보게 된다. 꿈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자기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였습니다” “~라고 생각합니다만” 등 꼬박꼬박 경어체를 썼다. 하지만 시종 진지했던 인터뷰 때와 달리 카메라 촬영에선 셔터가 돌아갈 때마다 갖가지 표정을 연출해보였다. 천상 배우였다. 그것도 계속 ‘진화하는’ 배우다. -‘행복한 배우’라는 말씀을 많이 들을 것 같습니다. 최근엔 연기인생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 주연(더 게임)도 맡았습니다. “어쨌든 이 나이면 집에서 손자들하고 놀아야할 나이고 쉬어야할 나이인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저한테는 행복이고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그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 아니겠습니까. 더 바람이 있다면 욕먹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런 연기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배우들 속에서 같이 공존하면서 조용히 끝을 잘 마무리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연세는?) 이번 영화 끝나면서 나이 이야기는 안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스태프들이나 상대가 자기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다고 어려워들 해요. 저는 그게 아닌데 괜히 상대방이 어렵게 생각하고 하다보면 서로 오해들이 생기고 그런 경우가 있단 말이죠. 환갑은 넘겼습니다만.”-경제적으로도 풍족해졌을 것 같은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배우가 얼마나 넉넉한 생활을 했겠느냐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요즘 TV도 그렇습니다만, 주인공에 대해선 대단히 힘을 쏟지만 주인공이 아닌 쪽은 아주 쉽게 선택하려는 풍토잖아요. 저는 이미 수십년 동안 이걸(배우) 해오면서 일하는 것이나 돈을 받는 것에서 정리가 된 사람입니다. 근간에는 1년에 한 두개 일을 해왔으니, TV 할 때 보다는 나은 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배우가 됐습니까. “학교 시절에 영화를 많이 봤죠. 고향(전남 장성)에서 상경해서 좋은 제약회사에 있었습니다. 저녁에 숙직실에서 있으면서 방송을 듣는데 그때 연속극이 시작됐고, 라디오에서 어쩌다가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오게 된 거죠.”-배우가 된 뒤 꽤 어려운 시절을 보냈죠? “라디오를 좀 하다가 TV로 옮겨왔는데, 첫 역할이 노역이었습니다. ‘수사반장’에서 잡범, 도적놈, 간첩, 도굴꾼, 교주, 높은 놈은 아니고 바닥만 했어요. 그것 때문에 가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어요. 어느 날 6학년 다니는 큰 아이가 울면서 들어와서 ‘아빠! 그런 거 안하면 우리는 못먹고 사느냐’라고 하더군요. 아이들이 놀렸나봐요. 자식 셋을 키우면서 학교 간 적도 없고, 애들 생활기록부에 아버지 직업을 쓸 때도 ‘방송국’이라고 썼어요. 구체적으로 쓰라고 하면 제작부라고 써서 보냈죠. 나중에 방송국에 나와서 부장한테 그런 이야기(악역만 하는 것에 대한 항의)를 했다가 미친 놈이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연기를 그만두려고 하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74년도에 코믹 드라마를 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식으로 그 이야기를 받고 선배들하고 상의를 했는데,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하라면 하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분도 계셨어요. 그때 이것저것 생각해서 보따리를 싸고 말았습니다. (배우로서 자존심이 발동했군요?) 돌아가신 극작가 차범석 선생님 밑에서 성우와 연극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코미디를 업신여긴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것 하고는 다른 쪽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주장하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그만두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시골로 내려갔는데, ‘수사반장’ 이년헌 PD가 연락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전화가 없으니까, 치안본부를 통해서 경찰서를 거쳐 파출소로 연락이 옵니다. 그래서 방송국에 가니 책(대본)을 주더군요. 그거 한편만 하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하고 방송국을 한번도 안나갔습니다. 그러다 비원 앞에서 선배를 만났는데, ‘너 참 나쁜 놈이구나. 방송국에 한번도 안나오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안좋습디다. 다음날 방송국에 인사갔다가 이년헌 PD가 책을 줘서 다시 방송을 하게 됐죠.” -그래도 TV에서 몇몇 역할은 큰 반응을 얻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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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희봉씨는 한국 영화계의 전반적인 부진에 대해 “영화를 볼 때는 시덥지 않게 웃기다가도 극장 밖으로 나오면 생각을 주는 영화가 몇 편이나 있느냐”면서 “감동과 생각을 주지 못하니까 실패한다”고 진단했다. <박재찬기자> |
“‘조선왕조시리즈-설중매’에서 유자광 역을 할 때는 ‘(천하가)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습니다. KBS ‘찬란한 여명’에서는 ‘대원군’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안국동 아씨’라는 게 있었어요. 제가 궁 안에 있는 점쟁이 역할을 했는데, 돌아가신 이승만 박사 말투를 흉내내서 경을 읽어서 인기를 끌었지요. (점쟁이 흉내를 내면서) 정말 음산하고 스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꽃을 다 피우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이 경을 따라 읽어서 교육상 좋지 않다면서 문공부에서 프로 자체를 없애라고 했고, 제 역할만 없어졌죠.” -이후엔 크게 위기는 없으셨습니까.
“96년인가 KBS에서 ‘회전목마’라는 드라마를 해달라고 했는데, MBC에서 두시간짜리 드라마 계약이 안 끝났다면서 못가게 했어요. 그때 아무일도 못하고 1년여를 쉰 적이 있어요. 그때 그때 벌어서 먹고 사는데 할 일이 없으니까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날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눈 뜨면 주섬주섬 옷입고 뒷산에 갑니다. 산에 가서 경사진 곳을 단숨에 오르고 숨이 차기 시작하면 괴로운 것을 잊어버립니다. 아침 먹고 또 가고 점심 먹고 또 가고, 그것을 달력에 표시를 해봤어요. 어느 날 친구들이 놀러와서 달력을 보더니 ‘야 이 새끼, 일이 이렇게 많구만. 매일 표시를 해놨구나’라고 하더요결국 실토했죠. 빚도 엄청나게 졌습니다.”
“봉감독은 은인중 은인 노년의 멜로 해보고 싶다”-외환위기 때도 일을 그만두시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1년을 쉬고 더러 연속극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IMF 때 어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저희들한테도 타격이 왔어요. 나이먹은 사람은 사례를 좀 깎아달라는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습니다. 저를 부자되게 해준 일도 없고 편하게 밥먹게 해준 일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듣고, ‘더하면 추접스럽다’ ‘사례 깎아가면서 이거하면 사람 꼬라지가 뭐가 되느냐’는 생각을 했죠. 애들이 다 컸으니까 그만둬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존심이 센 것 같습니다. “농경사회 시절에는 배우를 ‘딴따라’라고 했지요. 업신여김을 당했고 정말 그런 일들은 더러더러 있었어요. 친구들이 ‘야. 딴따라’하고 부르는데 정말 배우에겐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저는 시골사람이기 때문에 저의 가족, 돌아가신 선친께서 정말 싫어하셨어요. ‘하지 말라’는 그 간곡한 말씀을 거역하면서 맹세한 것은 소리가 없는 조용한 배우가 되기로 한 것이지요. 조용하게 사는 것이 내가 부모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그 때문인지 ‘자존심이 강하네 어쩌네’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봅니다.”-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을 만나서 ‘플란다스의 개’를 찍었고, 그게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됐지요? “98년인가 봉준호라는 사람이 자기 ‘입봉’ 작품을 해달라고 해서 두 말 않고 거절했습니다. ‘주인공이 아니면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당신들과 또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요. 그런데 봉감독이 한 번만 해봤으면 좋겠다고 자꾸 부탁했어요. 그렇게 해달라는 역할이 개 잡아먹는 아파트 관리인이었습니다. 하기로 한 것이니까 했지만, 개봉 후에도 그 영화를 볼 생각은 전혀 안했습니다. (그래도 출연한 영화인데…) 그냥 그런 수준일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으니까. 개봉 며칠 후 봉감독이 오전 11시쯤 전화를 해 ‘오늘 꼭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습니다. 망설이니까 ‘꼭 오시라’고 하는 거예요. 주점에 가서 두 홉 들이 소주를 한병 마셨어요. 나를 아는 사람들이 영화에서 개 잡아 먹는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에 한번에 다 마셨습니다. 얼굴이 붉게 올라온 채로 봉감독하고 영화를 봤지요. 그런데, 괜찮더라고요. 상상 못했던 신(장면)들이 있었어요. ‘봉준호 감독이 보통 머리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 후로 가족들이 가서 다 봤어요. 봉감독은 은인 중 은인입니다. 나이 차이는 상당하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괴물’에서 맡았던 박노인 역할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괴물을 향해 총을 쐈으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자 자식에게 피하라고 손짓하면서 눈을 내리깔고 죽음을 맞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봉감독은 맘에 들지 않으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NG를 냅니다. 그 장면은 열 번은 넘었지 않나 싶어요. 거기서 찍은 것 중 하나가 오케이를 받았는데, 영화에선 그 필름을 안 썼더라고요. 다른 필름을 썼어요. 그때도 같이 영화를 본 뒤에 밥을 먹으면서 ‘왜 오케이 필름을 안 쓰고 다른 필름을 썼느냐’고 물었더니 ‘에이~, 선생님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계세요? 다른 데다 쓸게요’ 하고 넘어가더라고요. 허허.”-젊은 시절에는 영화를 안했습니까. “몇 작품 했죠. 80년대 방송국 생활을 하면서 잘 풀리지 않아서 영화를 하려고 매니저까지 뒀습니다. 몇 개 했는데, 조연이지만 그래도 역할을 하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안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 문제를 마음껏 다루는 그런 영화를 많이 하는 시기였어요. 온 가족이 보는 TV에 나오는 사람이 그런 것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그만뒀습니다. 시나리오는 많이 왔지만, 대부분 이성관계 이야기, 남녀가 불붙어서 사는 역할들이 많았기 때문에 거절을 했어요.”-연기할 때 완전히 몰입하시는 편입니까. “네. 내가 하러 나온 그 연기 외에는 다른 것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동 자체를 그렇게 해버립니다. 웃고 시시덕거리지를 못해요. 어떤 배우는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플로어에서 온갖 장난하다가도 그 역할을 기가 막히게 해내요. 타고난 배우죠. 저는 그걸 못합니다. ‘저 사람이 화를 내고 있나’하는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아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이 직업입니다.”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많이 하는 편입니까.
“필요한 자리에는 많이 하지만, 필요없는 자리에는 토씨 하나도 안 틀리게 합니다. ‘괴물’에서 ‘오징어 다리가 몸통 맛 다르고 다리 맛 다르고 다 다른데, 그중 긴 다리 맛은 특별히 다른 건데 그걸 네가 먹으면 어떡하느냐’ 같은 것은 애드리브입니다. (그것도 재능 아닙니까) 애드리브를 잘하는 거 가지고 연기가 선천적이니 후천적이니 하지 않아요. 후천적이라도 작품이 완전히 머리에 들어와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본 종이의 절반을 잘라서 영화의 모든 신을 제 손으로 적습니다. 지문까지도 완전히 머리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 습성이 있어요. 많이 적을 때는 책이 너덜너덜해집니다.”-나이 들면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데 그 말에 동의하십니까. “당연하죠. 최대한 노력해서 좋은 인상을 만들 수 있다면 해야 합니다. 부모가 만들어준 틀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여배우들이 성형을 많이 하는데 40대, 50대를 넘어서면 결국 배우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연기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 아니겠어요. 결국은 남 인생을 대신하는 사람이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영화 열풍이 전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점이 뭐라고 보십니까. “필요 이상으로 경기가 좋았던 것 아닌가 싶어요. 책도 좀더 연구를 해서 써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감독들이 싫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작가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감독이 쓰고 연출까지 하는 게 아니라 작가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독이 쓰게 되면 자기가 찍을 거 생각하고 상황을 다 판단하고 쓰기 때문에 어려운 것을 다 피해가게 됩니다. 이러면 발전할 수 없는 것이죠. 작가가 쓴 것을 소화해낼 때 진실한 감독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관객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찍었으니, 와서 봐주세요’ ‘혼신을 다했습니다’ 외에는 할말이 없는 것들이지요. 메시지가 없단 말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고, 생각을 주지 못하니까, 실패를 한다는 이야기죠.”-이순재씨가 방송에서 후배들에게 “배우는 광고보다 연기를 해야 한다”면서 쓴소리를 했습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선배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줬으며 좋겠습니다. TV세트에서 촬영할 때 보면 나이먹은 사람들의 대기실에는 젊은 후배들이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아요. 살아볼수록 느끼는 것은 (젊을 때) 옳게 판단하고 옳은 것을 생각하려 노력해도 나중에 보면 옳지 않은 것을 한 게 더 많을 수가 있어요. 언젠가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름에 드라마를 찍는데, 여배우가 흰 목도리를 두르고 나왔어요. 그래서 내가 ‘목도리를 해야 하는 거냐. 오뉴월 이 더운 때에 맞지 않는 것을 하느냐’고 했더니, 분위기 때문에 했다고 변명을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다음엔 까만 목도리를 하고 나왔어요. 이래서야 배우가 되겠습니까.”-어떤 영화를 하고 싶으십니까. “한국적인 아버지 역을 하고 싶습니다. 손자들을 외국에 보내놓고 자식 내외가 쓸쓸히 있는 것을 보는 할아버지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교훈이 될 수 있다면 나이 먹은 사람의 멜로도 해보고 싶습니다. (다시 단역이나 조역 제안이 오면 하실 수 있습니까) 하죠. 가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캐릭터가 분명하고 메시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입니다.” -인생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자기에게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마음 속에 괴롭고 어두웠던 시절이 더러더러 있었어요. 그러나 시련 없이 크게 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련이라는 것을 겪어봐야 그다음에 조그만 행복도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희봉은 누구인가악역 단골 조연… 봉준호 감독 만나 ‘활짝’전남 장성 출신의 변희봉은 친척이 운영하는 제약회사에서 일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 MBC 성우 공채(2기) 시험에 덜컥 붙으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말대로 당시 “가난한 젊은이들이 희망했던 직업이 공부 잘하는 사람은 법조계고, 그 다음이 배우”인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역 면장을 했던 선친은 배우, 성우를 한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그는 악역의 단골이었다. 먼저 라디오에 나왔다. ‘강진 갈갈이 사건’ ‘무등산 연쇄살인사건’ ‘이종대·문도석의 칼빈 총 강도사건’ 등에서 살인자 역을 맡았다. 지금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옛날에 그분 아닙니까”라는 말을 듣는다. 성우로, 연극단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70년 드라마 ‘홍콩 101번지’로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하지만 인상 탓에 노상 악역이 주어졌다. ‘수사반장’의 사기꾼, 도굴꾼, 도둑 등 잡범, 사이비 교주 등이었다. 연기 경력이 쌓이고, ‘조선왕조시리즈 - 설중매’에서의 유자광, ‘찬란한 여명’에서의 대원군 역할 등 몇몇 드라마에서 잠시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지만,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플란다스의 개’를 준비하던 봉준호 감독을 만나면서 그의 연기는 빛을 보았다. 봉감독은 외환위기 때 출연료를 깎으려는 방송국 측에 항의해 연기를 접으려던 그를 스크린으로 끌어냈다.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그는 개 잡아 먹는 아파트 경비원 역을 익살스럽게 소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도 봉감독의 ‘살인의 추억’ ‘괴물’ 등에 출연하면서 점점 역할을 키웠다.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 ‘이장과 군수’ 등 장규성 감독의 영화에서도 무게 있는 조연을 맡았다. 지난 설날에 맞춰 개봉된 영화 ‘더 게임’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2006년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같은 해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최고의 영화상’에서 최고의 남자 조연 배우상을 받았다.〈 이용욱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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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의견)
인생은 한 방이다. 인생의 한 방을 믿고 준비하라. 사마천은 양반의 신분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받아 궁형(생식기를 잘리는 벌)이라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았으나 사기라는 역사상 최고의 사서를 쓰기 위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외친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다. 범부들은 이 정도의 치욕을 당하면 모두 죽고말지만 진정 뜻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뜻을 펼친다. 이들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사는 것을 택한다."
또한 오자서가 떠오른다. 간신의 흉계로 아둔한 초나라 왕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죽이자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기 위해 10여 년 이상을 타국에서 구걸과 노예 생활을 버텨가며 목숨을 부지하여 결국 초나라를 엎어버렸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떠 오른다. 명량 대첩을 앞두고서 백의종군에서 막 풀려난 그에게는 단지 13척의 함선이 남아 있었고 왜선은 무려 300 척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當死卽死. 死卽生, 生卽死也(죽어야 한다면 죽으면 그만이다. 허나 불의하게 살려고 하면 죽고, 의롭게 죽으려고 하면 산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전세계 해전의 역사에 유래가 없는 대승을 거둔다. 이와 반대로 이 순신의 바로 아래 직급이었던 배설은 이 싸움을 앞두고 두려워 도망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사로잡혀 사형을 당했다. 고작 부질없이 잠시 연명한 것이었다.
누구나 인생에서 몇 번은 압도적인 좌절과 고난을 경험한다. 자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배설이 될 것인가 이순신이 될것인가?